제5대 ‘경주 삼신할배’
대추밭백한의원 백진호경주=김성윤 기자입력 2025.06.28. 00:38업데이트 2025.06.28. 07:160

‘경주 삼신할배’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난임 치료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는 ‘대추밭백한의원’ 백진호(52) 원장.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 부부 등 유명 인사들이 여기서 약을 지어 먹고 임신에 성공했다고 소문나면서 더 유명해졌다. 얼마 전 예약제로 바뀌기 전까지 새벽마다 텐트 대기 줄로 북새통을 이뤘다.
대추밭백한의원은 5대째 난임 치료에만 집중해온 한의원이다. 경주 사람들이 흔히 ‘대추밭 마을’이라 부르는 경주 조전리(棗田里)에서 백 원장의 고조부 백진기 원장이 130여 년 전 개원했다. 이어서 증조부 백영흠 원장과 조부 백길성 원장이 한약방을 운영하며 난임 처방으로 명성을 쌓았다. 한의대에서 공부한 아버지 백수근 원장과 백진호 원장이 대대로 이어온 난임 처방 비법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현대 한의학과 접목시키며 난임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백 원장은 ‘저도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이덴슬리벨)라는 책을 최근 펴냈다. 백 원장을 만났다. 경주 외곽 사정동에 지은 한옥으로 이전한 그의 한의원에서. 그는 “난임 치료에만 130년을 바친 ‘대추밭’만의 처방과 치유법을 경주까지 오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난임 원인은 남녀 반반
−‘삼신할배’라기엔 너무 동안(童顔)이세요.
“저희가 5대째인 데다, 아버님이 주말 오전에는 여전히 환자를 보시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습니다. 저도 1999년 면허를 땄으니 이래 봬도 벌써 26년 된 한의사입니다(웃음).”
−밤새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하도 많아서 텐트 대여 가게들이 호황을 누릴 정도였다고.
“너무 힘드신 것 같아 예약제로 바꿨는데, ‘왜 바꿨느냐’고 컴플레인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예약제보다 밤샘 대기를 선호한다고요?
“빨리 보잖아요. 현재는 1개월 전 한 달 치 예약을 받아요. 예를 들어 7월 1일에 8월 치 예약을 받죠. 최소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거죠. 과거엔 텐트 치고 밤샘하면 늦어도 이틀 뒤에는 진료 볼 수 있었죠. 예약 자체도 어렵습니다. 예약 열자마자 3000명이 동시에 접속합니다.”

−아이를 바라는 분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국가 소멸을 걱정하는 저출생 국가 맞나 싶네요.
“절실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 아이를 가지려는 부부가 많아졌죠. 이분들은 엄청 다급해요. ‘정말 임신이 될까요’ ‘이 나이에도 가능할까요’라고 말할 때 눈빛의 떨림, 손끝의 뜨거움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난임의 가장 큰 원인은 뭔가요.
“늦어진 결혼과 이에 따른 노산(老産)이라고 봅니다. 요즘 평균 수명이 90세 정도 될 거예요. 100여 년 만에 거의 2배 늘었죠. 하지만 폐경 나이는 50세쯤으로 이전과 같아요. 가임 기간은 그대로인 거죠.”
−생활 습관도 예전보다 나빠졌다고.
“의식주 중 먹는 게 제일 중요한데, 요즘 너무 안 좋아요. 여성은 커피나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면서 운동·활동량은 줄었습니다. 남성은 너무 오래 앉아 있고 기름진 음식을 과잉 섭취합니다. 일찍 결혼하면 그나마 커버가 되죠. 결혼이 늦어지니 나쁜 식습관이 오래 누적되고,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난임이 늘 수밖에 없죠.”
−임신보다 중요한 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거라고요.
“저는 ‘임신 마중물 과정’이라 부릅니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으면 깨끗한 물이 쏟아지듯, 미리 자신의 몸을 살피면 임신이 훨씬 쉬워집니다. 부부가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난임은 남녀 절반씩 원인이 있다고요.
“난임을 여성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난임의 원인은 여성에게 40%, 남성에게 40% 있고, 나머지 20%는 원인 불명으로 나옵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뭘 어떻게 바꿔야 하나요.
“우선 여성은 자궁을 관리해야 합니다. 자궁을 따뜻하게 유지함으로써 혈액순환을 도와 생리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스트레스 없는 자궁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둘째, 남편과 나의 몸을 기록합니다. 산전 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와 남편의 체중을 관리해야 합니다. 비만은 여성에게는 배란 장애를, 남성에게는 호르몬 불균형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요.
“‘내 생활이 곧 내 정자다’, 늘 제가 강조하는 말입니다. 균형 잡힌 식단, 생활 환경 개선, 적당한 운동, 환경 호르몬 주의, 스트레스 관리 등 모든 게 내 정자를 관리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운동이 중요합니다. 근력 운동을 한 남성의 정자가 질과 양 모두 향상됐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먹으면 바로 애가 들어서는 묘약이나 비법은 없나요.
“그런 건 없어요. 저희가 부산대학교 의과대와 함께 한약재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데,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28가지 약재 중 작약을 포함한 3가지가 특히 효과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는 했습니다.”
−다른 한의원에서도 흔히 쓰는 약재들이죠.
“그렇죠. 하지만 배합이 다른 거예요.”
−배합에 따라서 그렇게 효과가 달라지나요.
“똑같이 요리 학교에서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배워도 식당마다, 조리사마다 맛이 다르잖아요. 우리는 집안에서 100년 이상 전해 내려온 가전비방(家傳秘方)을 분석·발전시켜 사용합니다. 저도 대를 이어 진료하고 있지만, 환자들도 대를 이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추밭에 오면 꼭 임신될 것 같은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난임 전문 한약방 5대손
백 원장은 어려서부터 한의원에 붙은 집에서 자랐다. “북적이는 환자들의 발소리와 온 집안을 감싸던 한약 내음, 순덩순덩 약재 썰던 작두 소리가 익숙합니다. 한의원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아버지는 ‘내 큰아들입니더’라고 말했죠. 그러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나는 이미 그곳의 다섯 번째 주인이었습니다.”
−고조부(백진기)께서 ‘대추밭 백약방’을 열게 된 건 본인의 문제 때문이었다죠.
“집안 장손인 고조부가 결혼 3년이 지나도 자손이 생기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답니다. 스스로 공부한 것을 토대로 지은 약을 고조모와 함께 드셨는데 거짓말처럼 임신이 됐답니다.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고조부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마을 입구까지 늘어섰고, 하루에 소 한 마리 값을 벌어들였답니다.”
−경주 시내로 이전한 건 3대 백길성 조부 때였죠.
“1970년 황오동 팔우정 삼거리로 옮기셨습니다. 당시 몇 걸음만 걸으면 경주역과 버스터미널이 있는 교통 요지였습니다. 서울·강원도 등지에서 찾는 환자들이 더 쉽게 올 수 있게 하는 할아버지의 배려였습니다.”
−50여 년 만에 시내에서 외곽 사정동으로 세 동짜리 한옥을 지어 이전한 이유는 뭔가요.
“10여 년 전 건물을 증축하려다 일이 커졌어요. 공사를 위해 문화재 발굴 조사를 했는데, 신라·고려·조선 시대 문화재 1800점이 쏟아졌어요. 게다가 경주시에서 한의원 부지 일부가 포함된 도로 증축 공사를 추진하면서 이전하기로 했죠.”
−처음부터 한옥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고요.
“역사문화보존지구여서 한옥만 지을 수 있었어요. 진일보한 한옥을 지어보자 결심했죠. 김재경 한양대 교수와 함께 전통 한옥을 재해석한 오늘날의 목조건축으로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죠. 원래 목조주택을 좋아해요. 최대한 나무를 많이 넣은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대추밭백한의원
−한옥의 특징 중 하나인 대들보가 없네요.
“전통 한옥은 지붕이 무겁습니다. 기와와 기와를 고정하는 진흙 무게를 지탱하려면 대들보나 기둥 같은 나무 부재가 두꺼워지고 많이 필요합니다. 진흙을 쓰지 않는 건식 공법으로 지붕을 만들어 무게를 줄였습니다. 진료실로 쓰는 한옥은 대들보 대신 강철 케이블로 구조를 보강해 목재를 30~40% 덜 썼습니다. 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한옥은 오스트리아산 집성목을 가공해 거대한 아치 기둥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한옥이지만 고딕 성당 내부 같죠. 대한민국 대표 사진작가 배병우씨의 경주 소나무 사진을 좋아해 많이 모았는데 여기에서 전시하고 있죠. 복합 문화 공간으로 쓰는 한옥은 공포(栱包·처마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춰 댄 부재)를 재해석한 화려한 나무 결구가 아름답습니다.”
−땅값을 제외한 한옥 세 채 공사비로만 70억원이 들었다고.
“사람들이 ‘서울 강남 아파트 3채는 샀을 텐데 돈 안 되는 일을 한다고 타박하더군요(웃음). 한의원을 5대째 하면서 사랑받은 만큼 좋은 건축물을 지어 경주의 품격도 올리고 즐거움을 주자는 사명감으로 한 일입니다.”
◇난임은 국가와 사회 모두의 책임
그는 책에서 “난임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했다. “난임은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는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식으로 저출생 정책을 세워야 하고, 의료계는 연구와 진료에 매진해야 합니다.”
−난임이 국가 책임인 까닭은.
“임신과 육아하기 좋은 사회였다면 아이를 많이 낳을 겁니다. 대학 가려면 사교육비가 많이 드니까 아이 낳기를 꺼리는 거죠. 최재천 교수님의 아이를 낳는 게 진화론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낳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어떤 혜택을 주면 임신이 늘어날까요.
“의대 광풍이잖아요. 다자녀 가정에 입학 우선권을 주는 건 어떨까요. 이 정도는 해야 변화가 조금은 오지 않을까요. 아이 하나 낳는다고 돈 찔끔 주고 생색내 봐야 효과 없죠.”

−‘광고 천재’ 이재석씨와 출산 장려 캠페인을 진행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요.
“130년째 난임 치료를 해온 우리가 사회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생각해낸 일이었습니다.”
−어떤 광고였나요.
“만삭 임신부의 봉긋한 배와 조선 달항아리를 대형 사진으로 제작해 경주 시내 이전 한의원 건물 외벽에 나란히 걸었죠. 사진 아래 ‘뱃속의 보물’ ‘땅속의 보물’이라는 짧지만 강렬한 광고 카피를 적었습니다. 임신부의 누운 배와 꼭 닮은 신라 왕릉 사진을 나란히 건 광고에는 ‘천 년을 이어온’ ‘천 년을 이어갈’이라는 카피를 붙였고요.”
−유서 깊은 한의원을 이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거나 싫지는 않았나요.
“후회는 없습니다. 다른 걸 했어도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요(웃음).”
−작년에 직접 쓴 소설 ‘위작’을 출간했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크리에이터는 문학가라고 봅니다. 괴테·셰익스피어 같은 분들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요. 저는 이과라서 그런지 스릴러·미스터리 같은 소설 장르는 그래도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시는 재능이 훨씬 있어야 가능하고요.”
−자녀가 대를 잇길 바라나요.
“아들과 딸이 대학에서 약학과 예술학을 각각 공부하는데, 앞으로 한의학을 하고 싶어 해요. 반가운 일이지만 경험을 많이 쌓고 나서 했으면 합니다. 요즘 의대 나온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만 빠져 있어서 환자를 잘 못 봐요. 공감력이 부족한 듯합니다. 의술을 넘어선 인술을 펼치려면 먼저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의원 하면서 언제 제일 보람을 느끼나요.
“대추밭백한의원에서 약 지어 먹고 태어난 ‘대추밭둥이’를 만났을 때, 그리고 대추밭둥이가 결혼해서 다시 찾아왔을 때 행복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우주예요. BTS가, 손흥민이, 오타니가, 일론 머스크가 태어날 수도 있잖아요. 물론 저처럼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웃음). 한 생명이 탄생함으로써 우주가 엄청나게 변화하고 확장하는 거예요.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 흥분되지 않나요?